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문단 편집) == 의의와 한계 == 이 간단한 한 마디는 인간이 몸 + 무언가(영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의 기초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의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플라톤#s-1|플라톤]]까지 끄집어낼 수 있다.][* 다만 데카르트에서 이 명제 자체는 사유하는 주체의 존재, 혹은 정신의 존재가 물질이나 육체보다 더 판명하게 인식 가능하고 보다 의심 불가능하다는 것일 뿐, 곧바로 이원론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가 이원론을 확실히 주장하는것은 성찰의 마지막인 6성찰이며, 여기에서 그는 경험적 지식에 대한 신의 보증을 전제로 사용한다.] 수많은 창작물들이 시간을 넘어서 우려먹는 주제를 제공한 것은 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바꿔써서 반박하는 방법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력한 반박 중의 하나가 바로 [[장자]]가 [[무아]]사상을 주장하기 위해 지은 고사들 중에 하나인 [[호접지몽|호접몽]]인데 사유를 하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되는 원론적인 '나'의 개념 자체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이기 때문.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매트릭스같은 가상현실을 생각해보자. 가상현실 속의 '나'는 여럿이 될 수 있지만 이들을 조작하는 '나'는 하나다. 가상현실 속에서 아무리 나비도 장자도 될 수 있다해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조작하고 꿈을 꾸는 존재인 '나'는 분명 한명이다. 즉 다른 말로 사유하고 있는 '나'는 하나뿐이다. 이를 근거로 내가 사유를 하는 주체인것이 아니라 사유 그 자체가 '나'라고 보는 관점또한 있을 수 있다. 간단히 게임을 예로 들자면, '나'는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라 게임을 하고있는 게이머인것이다. 그런데 내가 기억상실에 걸린 게이머라고 하더라도, 그 게이머는 분명히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데카르트가 증명하고 싶은 것은 이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무언가는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 같고, 이 무언가를 '나'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애초에 저 문장이 반박이 되지 못하는게, 여기서 존재의 증명이 되는 것은 '''생각한다'''는 행위 자체이다. "생각한다"고 하건 "생각한다고 생각한다"고 서술하건, 무언가가 생각을 하고 있단 것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생각을 할 주체 자체가 없다면 그걸 인식할수조차 없으니까.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 (착각)하기 때문에 이는 내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없는게 "생각한다는 생각" 자체가 그냥 생각이기 때문에 "생각한다"로 대체될 수 있는 것. "실제론 생각하지 않는데 생각한다고 생각한다"는 건 말 자체에 모순이 있어 성립하지 않는다. "사고한다" "추정한다"와 달리 단순히 머리 속으로 뭔가 떠올리는게 생각이기 때문에 어떤 존재건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고, 반대로 그 내용이 뭐든 생각 자체를 하고 있다면 그 존재는 부정할 수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나"라는 게 인간이건, 고도로 프로그램된 AI건, 심리학에서 자주 드는 예인 통속의 뇌건, 이미 죽은 시체의 뇌조각이 활동하며 만들어낸 마지막 생각이건, 인류가 멸망한 지 수만년이 지난 시점에 남아있는 의식(영혼)의 파편이건, 유령이건, 생각이 있다면 어쨌건 그 주체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여기에서 마음의 직관적인 투명성에 기대어서(타인의 마음은 볼 수 없지만 자신의 마음은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게임을 하고 있는 구체적인 나' 말고 '무언가 내 마음을 돌이켜 생각하는 나'를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무의미한지는 여전히 논의 대상인 상태. * [[프리드리히 니체]] : 니체는 언어적 접근으로 비판한다. 인도-아리아 언어는 주어 + 술어의 구조의 문법을 가지는데 이 문법, 즉 언어적 습관은 주어가 존재한다는 숨은 믿음, 또는 전제가 이미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복수의 생각하는 행위들이 '나'라는 관념을 만든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 ><선악의 저편>, 55. 여하튼 서양의 '주체로서의 자아'을 대표하는 기초가 된 말이기 때문에, '의심의 세 대가'로 불리는 근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많은 반박을 받은 명제이기도 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성은 존재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해당 어구를 '그 무엇이 생각한다'로 치환시킨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드, 자아, 초자아를 꺼내면서 '나는 생각한다' 이전의 단계를 설정하면서 '생각하는 나'의 절대성을 무너뜨렸고[* 프로이트의 이론이 경험론적 한계로 인해 사실상 매장되기도 했고, 현대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을 부정하긴 하지만, 반면 경험과학적으로 의식에 앞서 행동이 이루어진다는 연구가 있기 때문에, 의식 이전의 단계가 있다는 공통적 요소에서는 상기할 만하다.] [[카를 마르크스]]는 물질적 토대와 사회에 기초해 개인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여 관념론적인 데카르트의 사고를 반박한 바 있다. [[장폴 사르트르]]는 진리에 뿌리를 두지 않은 개연은 모두 허무속으로 와해되어 버릴 운명 이라고 했다. 때문에 확고한 개연을 세우려면 확실한 진리가 있어야 하고, 그 절대적 진리는 단순하고 중계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서 '코기토'에 절대적 진리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또한 자아가 스스로를 파악함으로서 얻어지는 이 이론에 의해 자아는 확고한 것이 되고, 반대로 바깥 세계의 모든 현상은 단지 있음직한 일이 되어 버림으로서, 코기토는 진리에 기반하여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며, 단지 물질로 여기지 않는 유일한 학설이라 주장했다. 작가 [[마광수]]는 인간에 대하여 중 '인간은 '문자'의 굴레 속에 있다'에서 비판했다. 여하간 데카르트의 이원론에까지 이어지는 추론은 이후의 과학계와 철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미 근대에서부터 라이프니츠와 같은 사람들은 실체 일원론을 주장했고, 칸트나 흄과 같은 사람들은 코기토 논변 자체는 명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자아 개념에서부터 신의 존재에까지 나아가는 추론은 정당하지 않다고 보기도 하였다. 철학이 아닌 현대 경험과학쪽 근거를 보면, 애초에 뇌의 이상이 의식의 이상으로 이어지는 물질적 선후관계가 있는 데다가, 20세기 말부터 시행된 과학적 실험들의 결과로 [[자유의지#s-3|'''의식'''은 뇌의 반응 이후에 따라오는 '''현상'''이라는 것이 최근의 결론]]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경험하는 표면적 의식이 독립적으로 기능한다거나, 혹은 사고실험의 시발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추론은 어려워지고 있기도 하며 21세기에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등장한 [[가상 현실]] 개념을 접목시킨 형태의 반박도 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는 시뮬레이팅 중인 가짜 세계이며 그 안의 모든 생명은 단순히 프로그래밍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일 뿐이라는 식인데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지구멸망]] 문서의 [[지구멸망#모의 실험 중단|모의 실험 중단]] 항목을 보면 된다. 아무튼 데카르트의 이원론적인 통찰은 다소 낡은 입장으로 분류되므로 어디에서 섣불리 인용하지는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듯 현대에는 부정되는 쪽으로 기우는 추세지만 계몽주의의 효시격으로 일컬어지는 한 마디로 역사적인 의의는 충분하다. '자아'와 '세계'를 완전히 분리해서 보는 근대철학의 태도는 이 말에서 기반을 얻었으며 신앙공동체(교회)와 정치공동체(영주)의 명령에 따르는 부품으로서의 '주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 서게 한 것도 이 고찰이다. 이 문장으로 표현되는 사상적 경향이 결국 시민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이므로 의외로 큰 의의가 있다.[* 심지어 이런 시각 조차도 어쨋든 데카르트가 이런 논리 전개를 처음 펼쳤기 때문에 이후에 명제의 참을 가르기 위해 싸운 결과물이다. 데카르트가 이런 말 조차 하지 않었더라면 이런 부정 자체도 없었을 것이다. 어쨋든 이 발언 자체는 데카르트의 허세적 발언이나 대충 내뱉은 발언이 아닌, 몇년간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쨋든 이 모든 걸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 자체는 참인 거 같다."라는, 그 당시에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던 셈이다. 현대인들이 당시의 데카르트의 고뇌를 고려하지 않고 쉽게 헛소리로 치부할 정도로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